논리실증주의를 넘어서는, 논리실용주의 좋은 이야기들

일반적으로 논리실증주의란, 분석/종합의 구분 및 의미환원주의라는 두 가지 도그마를 받아들이는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하지만 1950년대 무렵부터 논리실증주의 프로그램이 다소 강한 공격을 받게 되어, 사실상 논리실증주의 프로그램, 적어도 비엔나 학파의 도그마를 따르는 프로그램은 심하게 좌초되게 되는데... 이러한 논리실증주의 프로그램의 좌초를 야기한 공격진영은, 크게 존 오스틴과 그의 제자들 및 동료들로 구성된 옥스퍼드 학파 또는 일상언어 학파와, 콰인을 중심으로 기존의 형식논리학의 사용 및 중요성을 유지하면서도 뭔가 다른 방식의 실증주의를 시도하는 이른바 논리실용주의(logical pragmatism) 추종자들, 이렇게 두 가지 진영으로 나뉜다. 여기서는 잠시 옥스퍼드 학파, 일상언어 학파에 대한 얘기는 제쳐놓고, 콰인을 중심으로 발생한 논리실용주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논리실용주의자들은 분석/종합의 구분을 반대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분석/종합의 구분이란, 모든 의미있는 진술(또는 문장)이 크게 개념정의적 진술인 분석적 진술과 개념에 사실의 여부를 더해 참/거짓이 결정되는 종합적 진술로 나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콰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실제로는 분석/종합의 구분으로 날카롭게 진술들의 종류가 나뉘는 것이 아니다. 둘째, 분석/종합의 구분을 가능케 하는 이른바 분석성(analyticity) 개념이 옹호되지 못한다. 먼저 첫째 주장을 살펴보면, 분석적 진술은, 개념적 정의로서, 흔히 철학교과서들, 이를테면 인식론 교과서 등에 나오는 세미-형식적 진술들에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 *s가 p를 안다 iff s는 p라는 것을 믿는다 & p는 참이다 & ...*라는 식으로 지식(knowledge) 개념을 정의하는 인식론적 정의는 분석적 진술의 표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콰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실제로는 철학적 진술이란, 그런 식으로 개념정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모든 낱말들과 대상들이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다. 이것은 콰인의 유명한 전체론(holism)과 이론적 상정(theoretical posit)에 관한 주장으로서, 흔히 철학적 탐구 대상인, 즉 개념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들에 국한되거나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논리실증주의자는 *지식*, *도덕*, *보편자*, *언어* 등등은 철학적 탐구 대상으로 생각하더라도, *고양이*, *나무*, *코딱지* 등은 철학적 탐구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그 논리실증주의자는 *지식*, *도덕*, *보편자*, *언어* 등에 대해서는 *s는 p를 안다 iff ...*, *s는 도덕적이다 iff ...*, *s는 보편자이다 iff ...*, *s는 언어적 표현이다 iff ...* 등으로 개념분석으로 시도하겠지만, *s는 코딱지이다 iff ...*라는 식으로, 전통적인 철학적 탐구 대상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 *코딱지* 개념에 대해서는 개념분석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콰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모든 것이 이론적인 탐구대상이므로, 모든 것들이 철학의 주제 범위에 포함되어야 한다. 아울러 진술들이 개념정의를 하는 분석적 진술과 사실을 묘사하는 종합적 진술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술들이 그 자체로 개념적으로 유의미하면서 동시에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즉, 의미있는 진술들이, 분석적 진술과 종합적 진술로 아주 날카롭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아울러 콰인의 유명한 논문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에서 설명하듯, 분석/종합 구분을 가능케 하는 분석성 개념은, 정의(definition), 교환가능성(interchangeability), 의미론적 규칙(semantical rules)들로도 옹호되지 않고, 오히려 순환적이다. 그러그러한 개념이 저러저러하게 정의되기 때문에 분석성이 가능하다는 것은, 달리 말해, 개념 정의가 분석성보다 앞선다는 말인데, 이는 말이 수레를 끄는 게 아니라, 수레가 말을 끄는 것 같은 잘못됨이며, 교환가능성, 즉 언어표현을 교환하거나 언어표현의 외연을 교환하여 분석성을 설명하는 것도, 달리 말하면, 의미로 분석성을 옹호하려는 시도에 한참 벗어나있으므로, 역시 자기모순적이다. 의미론적 규칙은 단순히 의미론이 성립하는 이론 내에서 그러그러한 규칙을 정하여 분석성을 설명하려는 시도이지만, 이 역시 의미 및 분석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러저러한 이론을 만들 때의 임의적으로 결정한 규칙에 불과한 것이라서, 역시 분석성을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석/종합의 구분을 버리고, 분석성 개념을 버림으로써, 콰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일까. 콰인과 그의 추종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실용주의(pragmatism)로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한다. 첫째, 의미전체론(meaning holism)을 받아들인다. 앞서 언급되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의미있는 진술들이 개념정의적인 분석적 진술과, 감각경험을 언급하는 구조로 환원되는 종합적 진술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석적 진술과 종합적 진술 모두 우리가 생각할만한 의미있는 진술들을 다 포괄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모든 개는 동물이다*라는 진술은 *개* 개념을 정의하는 이른바 분석적 진술인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모든 개는 펭귄이다*라는 진술은 *개* 개념을 정의하는 분석적 진술도 아니고(개념 정의가 틀려서), 그렇다고 해서 감각경험으로 환원되는 진술도 아니다(개가 펭귄인 것 같은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없으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개는 펭귄이다*라는 진술은 우리가 언어표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아니고, 자연언어 문법적으로나, 술어논리의 논리적 형식으로나 *모든 개는 동물이다*라는 진술과 거의 같은 형식 내지는 구조로 되어있는 말이다. 그래서 콰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모든 개는 펭귄이다*라는 진술은 *모든 개는 동물이다*라는 진술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있는 진술이며, 아울러 *모든 진술은 어떻게든 참인 것으로 주장될 수 있다*는 새로운, 실용주의적 슬로건 아래, 의미있는 진술로 받아들여지고, 주장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와 이론과 과학 전체가 단일한 의미의 대상이며, 언어 및 이론 및 과학 전체의 문장들은 서로 참/거짓 여부에 있어서 각각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항상 개념분석적 진술로 *s는 ... 이다 iff*라는 식으로 철학적 진술을 활용하던 논리실증주의의 스타일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아울러 둘째, 논리실용주의는 자연언어에 대한 재배치(regimentation)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앞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기존의 자연언어와 구별하여 철학적 언어를 개념분석이나 의미환원주의적 방식으로 철학적 방법을 시도한 것과 대비적으로, 모든 자연언어 문장들을 형식논리학으로 풀어쓰기(paraphrase)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철수가 영희를 만났다*라는 문장을 종합적 진술이라고 생각할 때, 이 문장을 풀어쓰는 방식은, 의미환원주의의 기준에 따라서, *철수가 영희를 만났다는 것은 다음의 경우에 오직 다음의 경우에 참이다: 철수가 영희와 가까운 거리에 있고 철수와 영희가 서로 알아보는 듯한 표정과 제스쳐를 취하고 철수는 영희가 철수의 앞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 등등...*이겠지만, 이러한 정의적(definitional) 방식의 의미론은, 앞서 정의가 틀린 것으로 반박되면 다시 개념정의를 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고, 결국엔 어떤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반면에 논리실용주의의 재배치 방식은, *철수가 영희를 만났다*라는 진술을 거의 있는 그대로 풀어쓴다. 예를 들어, 콰인이라면, 아마도 *철수가 영희를 만났다*라는 진술을, *철수인 x가 있고, 영희인 z가 있으며, x는 z를 만났고, x는 z와 동일하지 않다*(여기서 x와 z는 각각 한정기술구로 양화분석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라고 분석한다. 즉, 여기서 *...가 ...를 만났다*라는 것에 대해서 더이상 개념정의적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가 ...를 만났다*라는 술어는 그저 그 술어의 논항을 변항이나 이름으로 채워넣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무튼 그리하여, 단순히 개념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철학적 임무가 아니라, 이론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모든 낱말과 대상들이 철학적 탐구 대상으로 삼는 것이 철학적 임무이며, 이에 따라 논리실증주의의 문장-단위 검증주의가 아니라, 이론-단위 검증주의, 또는 검증 전체론이 새로운 철학적 유행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